그런데 이 성벽을 만들 때.
온전한 석편일 때 부친이 직접 만들어 중국에 보낸 탁본이 더욱 반가웠을 것이다.오경석은 이 석편을 1855년 평양부치(平壤府治) 서쪽 10리 지점인 오탄강변의 한사정(閑似亭)에서 보고 한양에 가져왔다라고 기록했다.
이후 그의 스승이 되어 간송의 문화재 수집과 감정을 도왔다.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현재 보물로 지정된 석편이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집안에서 급히 이사하다가 깨뜨려 두 동강이 나 있었다.오세창의 전서(篆書) 병풍은 지금의 우리에겐 그저 외계어같이 보일지 몰라도.
그의 이름은 애국계몽운동사에도 3·1운동사에도 등장하지만.
‘문자가 새겨진 돌을 귀히 여긴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이 짧은 글에 적힌 선조들 이름이 모두 전시장 여기저기 등장한다.
남한에는 딱 1개가 이화여대박물관에 있어.즉 ‘쇠와 돌에 새긴 글을 모으고 분석해 역사적 사료로 가치를 찾는 작업은 청대 실증주의 영향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겨우 본격화한 일이다.
이 실물을 오세창이 직접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김인혜 미술사가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