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
일본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사태를 악화시킨 청의 개입 청에는 책임이 없었는가? 동아시아에는 수백 년 동안 조공관계가 지속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
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일본·중국·러시아가 물고기(조선)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사회적 관심을 끄는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 논쟁이 시작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이렇게 구한말의 역사는 하나의 원인에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
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그 누구도 변화의 성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